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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단체-Then&Now (3)] 봉제협회, 한인상권 본격 태동시킨 '돈 줄'

본격화된 70년대 들어서는 봉제공장 인력의 90% 이상이 한인 여성일 정도로 초기 한인 이민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 때 '남청여봉' '밟아라 삼천리'라는 말이 생겼다. '남자는 청소 여자는 봉제'를 줄인 말이다. 생계를 위해 미싱을 밟았던 당시 고된 이민생활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현이다. 언어 때문에 일터가 한정돼 있던 한인들에게 취직도 쉽고 월 수입도 300~500달러로 좋은 봉제 업체로 고학력자 외교관이나 교수 부인까지 몰렸다. 그러면서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던 LA 봉제 업계를 한인들이 급속도로 잠식했다. 70년대 중후반 즈음에는 전체 5000여개 중 한인 봉제 업체가 약 250개로 성장했다. 풀타임 한인 직원만도 1만명이 넘었다. 이 즈음은 노동청 단속이 갑작스레 강화되던 시기였다. 통보없이 들이닥친 단속반의 과잉단속이 이어졌다. 일만 하느라 사업체 운영 관련 법규나 제반사항에 대해서는 백지상태였던 한인 업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몇몇 업주들과 과잉단속 현장을 목격한 당시 봉제 업체 대상으로 보험을 하던 변창환씨가 모여 의견을 나눴다. 봉제 업체들의 목소리를 낼 필요성에 대해 모두 공감했다. 한인 업체들을 보호하고 권리를 찾기 위해 77년 협회를 조직했다. 1978년 5월12일 '가주한인봉재협회' 지금의 '미주한인봉제협회'가 창립됐다. LA한인회 LA한인상공회의소 등에 이어 생긴 주요 한인 단체였다. 초대회장은 변창환씨가 이사장은 안이준씨가 맡았다. 창립멤버에는 김히영(2대) 이기명(2대 이사장) 한삼권(3대.작고) 안종식(5대) 천영철(7대) 김응식(5대 이사장.19대 회장) 김시용 박준호 이원준 등이 있다. 봉제협은 곧바로 '가주봉재협회보'를 창간했다. 한인 단체로는 처음으로 78년 7월20일 1호가 발행된 가주봉재협회보는 지금까지 이어져 매달 15일 나온다. 봉제협은 회보를 통해 업계 관련 정보 제공에서부터 운영 교육 각종 법규 계몽 등에 주력했다. 또 한인 봉제 업체들간의 협조 및 단결 과당경쟁 자제 과잉단속 및 고용주와 고용인간의 갈등 해결 등에 나서며 분위기 쇄신에 힘썼다. 또 법적 문제 해결책을 제시 업주들의 고충을 덜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관계당국과 직접 절충 방법을 찾는 동시에 항의 및 개선 편지를 보내는 등 한인 봉제 업체 권익을 위해 나섰다. 변창환 초대회장은 80년까지 3년동안 봉제협의 체계를 세웠다. 80년대에는 한인 업체가 1500여개에 이를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LA한인타운내 아파트와 상가를 매입하고 은행을 여는데 참여했다. 타운 경기가 봉제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인 상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때 봉제협도 성장을 거듭했다. 82년부터 10년동안 경영교실을 운영했으며 83년에는 USC에서 10주동안 '봉제 경영 혁신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봉제경영지침서' 1집을 85년 2집을 발간했다. 84년에는 일본으로 봉제산업 시찰을 나가기도 했다. 이후 틈틈히 해외로 나가 시찰을 통해 사업 아이디어를 얻는데 활용했다. 86년에는 한인 봉제 업주 64명을 대상으로 UCLA USC 익스텐션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진형기 박사의 시너지 경영교실'을 처음 진행하기도 했다. 봉제협의 경영교실은 지금도 매월 또는 격월로 실시되고 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는 사향으로 돌아섰다. 80년대 중후반부터 종업원이 타인종으로 대체되면서 상해보험 등 압박 요인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90년대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잦은 상해보험 청구로 인한 보험가입이 힘들어졌고 상해보험 허위청구는 소규모 업체들의 폐업으로 이어졌다. 이에 봉제협은 93년 상해보험법 시정 요구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내부적인 갈등 및 문제 외에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면서 봉제 업계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멕시코 등에 공장 설립이 러시를 이뤘다. 이는 2000년대에도 이어졌다. 중국 베트남 등으로 향했고 의류의 해외 생산이 늘면서 봉제 업계는 상당 부분 힘을 잃었다. 주요 인력도 한인에서 라틴계로 변했다. 95%에 달하던 한인 직원은 지금은 5% 미만으로 줄고 대신 라틴계 직원이 95%를 차지한다. 현재 전체 봉제 업체는 3000여개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한인 봉제 업체는 1200여개 영세 업체까지 포함하면 1500개다. 업계 구성 인종도 중국 월남 남미 등으로 다양해졌다. 봉제협은 올해로 31년이 됐다. 업계가 위축되면서 협회 활동도 침체됐었던 것이 사실. 하지만 30주년을 보내고 31년을 맞으며 새로운 도약의 해로 정했다. 6대 회장을 지낸 박철웅 사무국장은 "일만 해왔는데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다"며 "회원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친목을 다지는 기회로 삼아 제2의 도약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재희 기자 jhlee@koreadaily.com

2009-01-29

[경제단체-Then&Now (2)] 한인의류협회, 4·29폭동때 똘똘 뭉쳐 한인상권 보호

1977년 한인의류업체 탑스타일과 이본오브캘리포니아가 다운타운에 처음 입성한 이래 30년 넘게 남미 및 주류 시장에서 벌어들인 자본이 한인상권 성장의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다. LA한인의류업계의 성장과 함께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한인의류협회(이하 의류협)다. 현재 800여개의 회원사가 등록돼 있는 의류협은 각종 정보제공 골프대회 등을 통한 회원사들간의 친목도모 비즈니스 사고시 공동 대처 등 다양한 업무를 통해 한인의류업계의 성장을 20년간 '묵묵히' 도와왔다.올해 5월1일이면 의류협 설립 20주년을 맞는다. 70년대말 한인의류상권이 태동하며 82년 매직패션(사장 이경용) 라칼러스(사장 정홍섭) 엠파이어(사장 표경만) 등 20여개 업체가 모여 친목모임을 가진 것이 의류협의 첫 걸음이었다. 1989년 김인 초대회장을 주축으로 모임이 형성돼 발족한 것이 현 한인의류협회의 전신인 한인의류도매인협회였다. 당시만 해도 제조업체보다는 중간도매업체가 주를 이뤘기 때문. 당시 한인의류업체 수는 120여개. 1993년 협회 명칭을 '한인의류협회'로 변경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업계의 대변인=지난 20년간 의류협은 한인의류업계의 이익을 대변해왔다. 1992년(회장 안영복) 4.29폭동이 일어났을 때 협회를 중심으로 폭동 소요대책을 마련하고 회원사들이 협력해 당시 의류상권을 보호했다. 의류협회는 폭동을 겪고 다음해인 93년(회장 김인호)에는 자체 방범 실시를 시작했고 94년(회장 주영기)에는 사설 방범업체 베스트 시큐리티를 선정해 다운타운의 치안을 맡겼다. 1996년(회장 잔 서)부터는 연방노동청과 함께 노동법 세미나를 주최 지금도 매년 2~3회씩 세미나를 개최해 회원사들의 피해를 방지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다운타운 의류상권의 주요 고객들이었던 남미 특히 멕시코의 페소화 가치가 폭락하며 남미 바이어들의 발걸음이 줄기 시작했다. 이같은 흐름에 맞춰 의류협회는 98년(회장 한계환) 99년(회장 강용대) 2년에 걸쳐 주류 패션쇼 및 트레이드쇼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현재 한인의류업계에도 잘 알려져 있는 라스베이거스 매직쇼도 이때부터 한인의류업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며 LA다운타운 의류상권에서 키머니 분쟁이 불거졌다. 이에 따라 2000년(회장 신남호)에는 일부 회원사들이 키머니 요구에 대해 건물주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협회에서 공동대처하기도 했다. 결국 건물주가 키머니 요구를 철회했다. 이후 주류 정치인들을 만나 꾸준하게 키머니와 하청업체들의 노동법 위반 벌금이 원청업체인 의류업체에 부과되는 AB633법의 부당함을 적극 홍보하기도 했다. 2005년(회장 최대호)에는 한국 경기도 고양시에서 열리는 '제4차 한상대회 섬유 특화전'에 협회차원에서 참석 미국의 LA 아르헨티나 브라질 한국의 의류 및 섬유업계 관계자들간 네트워크를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지금도 매년 10월 의류협은 한상대회에 참가 세계 한인의류업계 관계자들과 네트워크를 쌓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이 WTO에 가입하며 중국과의 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노동집약적인 의류업계의 특성 때문에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으로 진출하는 한인의류업체들도 빠르게 늘어갔다. 의류협회는 2007년(회장 명원식)부터 해외 방문 프로그램을 도입해 회원사들이 해외 의류 설비를 직접 두눈으로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2007년 5월에는 15개 회원사들과 함께 중국 광주 상해 항주를 방문 의류제조업체 시설을 방문했으며 2008년 3월에는 12개 회원사들이 북한 개성공단을 둘러봤다. ▷커뮤니티 봉사=지난 20년간 한인의류협회의 역할은 단순히 회원사들의 이익 대변만이 아니었다. 커뮤니티 등 각종 봉사 활동에 회원사들과 함께 참여함으로써 한인의류업계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1994년(회장 주영기) 노스리지 지진 당시 의류협회는 회원사들과 함께 피해지역에 의류 100상자 정도를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2004년에는 북한 평안북도에서 열차충돌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폭발사고인 용천역 참사 피해를 돕기 위해 회원사들이 성금을 걷어 1만5000달러의 성금을 지원했다. 2005년에는 주류사회에서 주최한 '사랑의 옷짓기' 행사에 털실을 대량 기부하기도 했다. 이 행사를 통해 노인아파트에 살고 있는 노인들이 직접 짠 털실로 옷 목도리 등을 미혼모들의 자녀나 고아원에 전달했다. 한편 2008년부터 경제가 급속도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한인의류업계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류협회는 올 한해 보다 발빠른 정보와 해외 방문 프로그램을 통해 활로 모색을 돕는다는 계획이다. 윤천욱 현 회장은 "젊은 의류인을 대거 영입해 경험과 패기가 조화를 이루는 단체로 거듭나 한인의류업계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말했다. 서기원 기자 kiwons@koreadaily.com

2009-01-22

[경제단체-Then&Now (1)] LA한인상공회의소, 36명 의기투합…한인타운 상권 기틀 마련

경제 위기 속 한인 경제단체들의 초창기 설립 모습을 살펴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들을 진단해 본다. 1971년 3월3일 LA한인타운 한영식당에 김중정씨 등 7명의 한인이 모였다. 당시 한인경제의 주종목이었던 가발업을 하는 한인업주들끼리의 출혈경쟁을 지양하고 한인상공인의 친목과 상호협조를 도모하기 위해서다. 현 LA한인상공회의소의 전신인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의 시작이다. 1965년 케네디 이민법이 통과되면서 1970년대 초반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자 수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올림픽과 8가를 중심으로 한인 상권이 막 형성될 때다. 당시 한인 경제의 핵심은 가발업이었다. LA에서 가발업을 하던 김시면씨는 자비 5만달러를 들여 김포공항 입구에 약 70피트(21m) 높이의 '조국에 드리는 탑'을 세우기도 했다. 1971년 3월28일에는 김중정 김종식 김경진 김시면 김영권 남궁봉 박규현 배기생 소니아 석 이교숙 이용 정화섭 조지 최씨 등 36명의 실업인들이 LA다운타운 힐튼호텔 대원각 참석해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대원각은 1969년 김정선씨가 연 대규모 한 중식 고급식당이었다. 남가주 한인상의는 그해 6월7일 대원각에서 56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총회를 열고 회장에 부동산업을 하던 조지 최씨를 선출한다. 초대 남가주 한인상의 사무실은 현재 머큐리 콘도로 바뀐 유니언뱅크 빌딩(3801 Wilshire Blvd) 1101호였다. 정관은 이교숙씨가 한국에서 들고 온 대한 상공회의소 회칙을 바탕으로 전문 25조로 만들었다. 조지 최 초대회장이 남가주 한인회 회장에 선출돼 한인상의는1971년 11월20일 이사회를 열고 이용(작고)씨가 2대 회장에 취임한다. 1973년 6월3대 회장 선출을 놓고 한인상의 이사회는 내분에 쌓였다. 발기인 중심의 이사회에서 전 상공인이 참여하는 이사회 체재로 전환됐다. 그해 12월 정기총회를 통해 가발업을 하던 이학조씨가 3대 회장에 선출된다. 이씨는 래디슨 윌셔 호텔을 인수하며 부동산 재벌로 떠올랐던 리오 이씨의 아버지로 엘리베이터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LA한인상의에는 4대 회장이 없다. 이에 대해 LA한인상공회의소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운 한군석 전 회장은 "아마도 숫자 '4'가 재수없다는 뜻에서 3대 다음에 5대로 건너 뛴 것 같다"고 말했다. 5대 윤병욱 회장은 1975년 12월 선거로 당선됐다. 31명의 이사가 양쪽으로 갈리면서 16표를 얻은 윤씨가 1표차로 당선됐다. 한인상의의 초기 사업들을 살펴보면 지금 못지않게 상공회의소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SBA융자 무역 부동산 투자 신용조회 소자본 투자 세미나 등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고 친선골프대회 모국방문으로 우의를 다졌다. 한국학교 지원을 위한 모금 만찬회를 개최하고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커뮤니티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또 한인 2860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경제실태 조사 설문도 실시됐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출판활동도 진행됐다. 기자출신인 윤병욱씨와 한군석씨가 각각 발행인과 편집인이 돼 만든 남가주 상공회보가 나왔고 1977년에는 '미주생활정보'라는 책이 발간되기도 했다. 상공회의소 정관이 틀을 잡고 개정된 시기도 이 때다. 당시 이사수는 31명. 이사 및 회장단의 임기는 2년 이었다. 지금은 이사 수가 88명이며 임기는 이사회비를 내지 않는 등 결격사유가 없는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이어 6대 이정수(1978~1979) 7대 장기열(1980~1981)씨가 상의를 이끌었다. 8대는 문창배 회장(1982~1983)이 회장선거에서 4표차 당선됐고 함께 경선을 벌인 양효길씨는 9대 회장(1984~1985)이 됐다. 그동안 2년씩 회장을 수행했으나 10대 이청광 회장(1986~1987) 때 부터는 1년씩하고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11대 회장인 한군석씨는 1974년 한인상의에 가입한 뒤 35년간 상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상공회의소 주도로 88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패서디나 로즈 퍼레이드의 꽃차를 등장시켰다. 예산이 26만달러로 당시 한인경제규모나 물가로 봤을 때 정말 큰 사업이었다. 이후 2003년 이민 100주년을 맞아 로즈 퍼레이드 꽃차가 다시 등장했다. 1989년 12대 이영송 회장 때는 미주 동포 실업인들 14명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13대 방미철, 14대 이용기, 15대 강득휘, 16대와 17대 하기환, 18대 정인철, 19대와 20대 김상호, 21대와 22대 강상윤, 23대와 24대 김성주, 25대 최명진, 26대 이용태, 27대 에리카 김, 28대 한문식, 29대 신구현, 30대 정주현, 31대 이창엽, 32대 스테판 하 현 회장등 LA한인경제 LA한인경제의 주역들이 상의를 이끌어 오고 있다. 스테판 하 현 회장은 "정관개정을 통해 회원과 이사 구조의 상의를 이끌어 가겠다"며 "1000명의 회원이 참석하는 '열린상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정 기자 kijungkim@koreadaily.com

2009-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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